신앙

(가톨릭 굿뉴스에서 퍼온 글) 글쓴이;西湖堂/이도희(아오스딩/edohyy)

From a distance 2016. 1. 31. 13:25

글쓴이;西湖堂/이도희(아오스딩/edohyy)



  <종교인의 신앙심과 지식의 공간>;

 

1. 종교사원(宗敎寺院)은 서로 다른 문화 이해의 표본.

 

1). 천주교/기독교가 통치해온 왕조와 더불어 서양문화를 대변하고 불교/유교가 통치해온 왕조와 더불어 동양문화를 대변한다면 그리고 이스람교가 중동과 아프리카를 대변한다면 모든 종교사원은 그것을 구심점으로 구성 되어온 사회를 대변하고 그 사회의 응집된 문화의 총체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2). 울산 근교에는 다른 문화권의 외국인들에게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보여줄 빼어난 불교사원이 있다. 통도사/성남사/표충사/운문사 또한 유명한 불국사/석굴암이 그것이다. 그리고 3천년전의 고대 생활문화의 표본인 언양 천전리의 암각화(岩刻畵)는 오늘의 산업공단과 더불어 울산의 “혼과 얼“ 이 담긴 자존심이자 자랑이다.   

3). 필자의 가족은 천주교인 이다. 그러나 이따금 집사람과 더불어 불교사원을 방문할때가 많다. 그때마다 부처님 앞에 서 있을때면 불교식으로 두손을 가지런히 모아 정성스럽게 절을 한다. 이러한 행동은 신앙 보다도 문화의 위대함과 웅장함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짐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가? “종교의식은 바로 종교심”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 종교심에서 위대하고 웅장함이 창출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는 불가사의한 문화재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할때가 적지 않다.    

2. 다양한 신앙의 종교가 혼재된 비빔밥 문화속의 종교의 조화.

 

한국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미국인 승려(현각 스님)께서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가 함께 하면서 신앙 생활의 조화가 서로 부딪침 없이 이루져 가고 있는 것이 한국만의 특이성 이라고 부러워 했다. 이러한 사회 상황이 다양성을 흡수 할수 있는 국밥 비빔밥 문화와 흡사 한 장점인것 같다. 그리고 그 현각스님은 하늘나라를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의미로도 해석해 주셨다. 그 스님은 이러한 한국을 좋아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삶을 택했다고 했었다.


1) 즉 마태복음18장3절에 말씀처럼;

“너희가 돌이켜 어린애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unless you turn and become lik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그런데 그 하늘나라는 누가복음 17장21절에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the kingdom of God is in the midst of you.) 라고 했다.

2) 그것은 저가 해석 하기로는 불교 교리의

범아일여(梵我一如;자신을 탐구하다 보면 우주의 원리와 일치한다.)해석이 결국은

진속일여(眞俗一如: 진리의 세계와 우리생활의 세계는 같다.)라는 해석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고 감히 더듬어 본다.

 

3) 또한 東學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내자신의 혼이 바로 하느님이다.)은 또 어떻게 풀이하여 이해 해야 올바를지 깊이 들어 갈수록 어려운 종교 세계인 것도 같다.

 

4) 중국의 老子사상과 한국의 혜강 최한기 사상(기학/氣學)은 하늘과 땅은 붙어 있다고했고 사람의 머리는 하늘이고 몸은 땅과 같다고 했다. 하느님이 사람의 머리인 두뇌인 영혼을 하느님과 꼭같이 만들어주시고 하느님과 달리한 것은 육체인 몸을 만들어 주셔서 두뇌영혼 영역을 몸(육체)에 한정해 놓은 것이 아닐가 여겨본다. 그러하기에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영역을 초월할수 없는 한계가 아닐가 생각된다.

5) 그래서 인지 인간은 이 지구상의 다른 어떤 동물 보다 때때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하느님께로 부터 부여 받은 유일한 고등동물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6) 학자들의 비평처럼 성서의 성경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소설로 이해함이 합리성이 있지 않을가 생각 된다. 문자시대도 아닌 시대에 그대로 녹음되어온 자체가 의문 스럽기도 하다. 

 

 

3. 신앙에관하여.

 

필자는 1967년 12월 23일 천주교 영세(본명; 아오스딩)를 받고 혼배성사로 결혼한 천주교인 이다. 그러나 IMF개인家産파산 이후 가끔 미사/성체성사에 참석하는 냉담자(미사 참석과 교리에 충실 하지 못함) 이기도 하다. 어쨋거나 종교심은 조금도 변함 없이 마음속에 담고 내 가족이(아들 딸과 처) 함께 믿고 있다. 천주교 교우가 되기 이전에는 어릴때는 어머님 따라 불교를 믿은 셈이었고 그 이후 여러 기독교 교회를 다녔고 결국 침례교에서 세례를 받았었다.


그러나 번민하는 저 자신의 영혼을 적극적으로 달래기 위해서는 또한 자신의 혼자만은 부족한것이 너무 많고 두려운 순간이 많다는 자체가 종교의 신앙이 불가피 한것이 아니었을가 생각된다. 합리적이고 자신의 믿음의 신앙을 집중할수 있는 종교를 영원히 택하고 싶어 했었다. 人生의 기댈곳은 종교신앙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 기회가 되어 야단스럽지 않은 천주교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인간의 기댈곳은 가족/친척/친구들이지만 人生의 기댈곳은 종교신앙뿐임을 통감한 셈이었다.

1966년 포병 중위로 광주 육군 포명학교에서 안동 예비사단에 발령 받아 전임(轉任) 되자 마자 바로 하숙집 옆에 위치한 안동 성당의 문을 노크하여 그때 당시 불란스 신부님을 찾아 안내를 청했었다. 그후 군에서 퇴역 하여 서울 천호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잘 선택 했다고 여기고 있다. 그 당시 나는 성체조배로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싶어 했었다.

마태복음 6장6절에 말씀처럼;

"너는 기도 할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But when you pray, go into your room and shut the door and pray to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ward you.)

1). 그때부터 1997년 까지는 자신의 고달픈 문제로 인하여 일방적으로 하느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해 왔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느님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1) 세계 50억의 인구 모두가 하느님에게 소원을 풀어달라고 매달릴 텐데 하느님은 그 모두를 한꺼번에 수용 할수도 없어 몹시 부담 스러울 것 같았다.

 

(2) 나 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을 텐데 나같은 사람까지 하느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나 만이라도 부담을 덜어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 했었다.

 

(3) 평소 하느님께는 내 주위에 좋은일이 있을때 깊은 감사의 기도만 드리 기로 했다. 좋치않은 일이 있을때는 하느님께 구태여 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하고 지나 버렸다. 이태리 어느 신부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를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때 이후 그런 믿음의 변화가 나의 신앙에 정착 되어 버린 셈이다.     

 

(4) 현재는 쥐뿔도 없지만 열심히 하여 하느님 사업을 효과적으로 도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도 사업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 할 것 으로 믿고 있기 때문 이다.

 

(5) 필자는 성격(character) 구조적으로 봉사 활동을 할 순종파 일군이 못되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만 끼칠 것 같아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 사업에 동참 하기로 하였다. 개인 특성상 나는 어떻게 노력 했어라도 재물을 마련하여 손발은 물론 온 몸으로 봉사 활동 하고 계시는 교우님들을 도울 생각을 했었다.  

 

(6) 도움을 드려야할 사람중에 필자가 가장 안탑갑게 생각하고 또 우선순위로 선정해 놓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소녀소년 家長들 이다. 그들은 눈물과 굶주림 속에서도 꿈 과 의지(意志)를 포기 하지 않는 대단하고 갸륵한 꿈나무들 이다. 그들에게 장하고 힘찬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할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조그마한 거주 단지(세대당7.5평 정도의 아파트)를 제공할 꿈을 갖고 있다. 어떤 장학회 보다 우리의 하느님 사업과 민족정기를 이어갈 의지찬 재목들로 생각 되었기 때문 이다. 그러한 정신이 우리의 신앙심과 민족정기를 진취적으로 발전 시켜 나갈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 이다.

 

(7) 믿음에관한 성가집 480번을 즐겨부를때가 많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르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사랑을 바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즐거이 바치리 믿음으로"  


 

4. 하느님과 천당에 관한 풍자적인 평론;

 

(1) 우리인간은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님을 알고, 험난한 이세상이 편치않음을 알고 울면서 태어 났다고 앞장에서 언급한바 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나왔으니 더 이상 늘 천국의 그림만 그리며 살아 갔어는 안된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인간은 꿈속의 세계 처럼 4차원의 세계인 과거-현재-미래를 왕래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 되어야만 현실에서도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꿈속" 자체도 현실과 함께 인생기간(life-cycle)에 포함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된다.    

 

(2) 우리가 죽음의 그 순간을 모르기 때문에 육체는 흙이 될지라도 우리 영혼은 영원이 살고 있으므로 죽음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서 편할 생각은 접어 두고 열심히 살다가 영혼만 움직여 가야 할것 같다.

 

(3) 하느님의 뜻은 일일이 다 알수가 없다. 그러한 기대는 불가능 하다. 열심히 살다가 그저 멍청하게 따라 가면 된다고 본다. 하느님 나라를 특혜 받아 가기 위해 로비활동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자중(自重)하며 보람있는 일을 너무 욕심내지 말고 묵묵히 해 나가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맡은 소임이 아닐까 생각 된다.

 

(4) 까뮤(實存主義 文學家);
"만일 누가 정의의 규범을 이 세상에 적응시키고 天主를 이 세상 정의의 재판에 상정한다면 많은 사람이 天主를 처단할것이다. 그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할때 반항밖에 다른 대답이 없었다"고했다.

 

(5) 지금까지 천당에 가신분들 분류;

이태리 어느 컴퓨터 통계학자가 통계를 어떻게 축출했는지는 잘모르겠으나, 기사내용인즉 천당에 가신분중 교황님이 다섯분 그외 일반인은 신도들보다 비신도들이 더 많았다고 했다. 이세상 인간사회를 풍자한 통계인것 같은데 인간세상에 시사하는바가 적지않은것 같기도 하다.

 

5. 하느님께 이 세상 경영에 관한 몇가지 질문;

 

(1) 교회/성당/불교성전/회교등의 성전 축성을 중지 시키고 착하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 가는 해당 교우 와 교인들에게 권력과 富와 관리능력을 부여해 준다면 그들이 모델이 되어 출혈로 축성한 성전(聖殿)이 없어도 이 세상은 좋은일을 본받기 경쟁이 되고 보이지 않는 흐럼속에 세상의 경영이 잘 되지 않았을까 감히 건의 하고 싶다.

(2) 우리 육체 일생은 고작해야 7-80평생인데;

(가) 유태인의 수난사/유태인종을 수천년 동안 고통을 주면서 어쩌자는 건지? 체벌이 언제 끝나는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해놓고 어쩌란 말인지?

(나) 독일 나치스 군대에게 600여만의 유태인의 죽음을 보고도 그렇게 침묵만 지키고 조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무슨 원죄를 그렇게 잔인하게 다룰수 밖에 없는지? 강한 의문을 가진다.

(다) 2001년9월11일 미국 뉴욕의 월드무역센터에 테러로 희생된 수천명의 교인들을 보고도 그렇게 조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라) 하느님의 기적(奇籍)을 그러한 사건때 교인들 앞에 확끈하게 보여줄수 없는 말못할 사정이 그렇게 많았는지? 가믐에 콩나듯 내보이 시면서 구약성서에 내보이신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에서 홍해를 다시 건너오면서 행한 무차별적인 잔인한 살상을 이태도록 미워해서 일가? 그렇게 하시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끝가지 사랑하고 있어서 그럴가? 아직도 나는 하느님의 처신을 이해하기 힘드려 하고 있는셈이다. 과연 하느님은 이 세상경영을 잘못 하시고 있는 것일가? 잘 하시고 있는 것일가? 끝없는 의문에 잠기고 있는 셈이다.

마태복음 5장3-4절;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라고 하시면 어질고 둔한 신도들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느님 말씀만 순종하라고 하시니 맹종 밖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인지? 자꾸만 어려운 답만 제시하고 있는것 같다.     

 

(마) 中國의 성현 老子의 말씀에 "가장 弱한 者가 가장 强한 者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그말씀에 위로를 받아야 할까?   

          

(바) 묵묵 추종하고 하느님을 대변해 강론/설교해 주시는 성직자들의 체면은 고려해 주실수 없는 것인지? 아둔한 질문을 자꾸만 드리고 싶다.

 

사) 弱肉强食이 사라지면 自然생태계(인간도 자연에 포함)가 파괴되기 때문이었는지, 창세기이래 여태까지 貧富격차를 하느님께서는 해결하지 못하였었다. 

 


6. 천운(天運)과 천악(天惡)은 천만분의 일에 불과.

 

우리의 삶 주위에서 천운(天運)과 기적(奇蹟)으로 부터 기대(期待)를 버려야 하고 천운(天惡)과 천마(天魔)의 공포도 떨처 버려야 한다.

1)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奇蹟)과 미신에서 말하는 천악(天惡/天魔천마)은 천만분의 일 보다 더 어려운 것 이므로 천운(天運)과 천악(天惡)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부터 해방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적(奇蹟)과 천악(天惡)은 없다고 여겨야 이 세상 삶 동안 불만이 없을것 같다. 그런 기대는 아예 접어두고 현실을 등한시 않도록 강론해 가는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 같다.

2) 마귀/귀신에게 대하여;

(1) 이 세상에서 마귀/귀신도 나타나면 이렇게 항의 답변을 해가며 살아가 보면 어떨까; “내가 죽으면 마귀 너는 나에게 또 한번 비참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내가 그때 너를 결코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빨리 내 주위에서 꺼저라!“ 라고 하면 마귀도 겁이 나서 달아날 것 같다.

 

(2) 이 세상에는 마귀 종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들이 두려웠어 현실을 등한시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우리가 죽으면 용서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우리 영혼이 약해지면 그들이 그 약한 순간의 허점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치 말아야 한다.

 


7. 죽은후의 환생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종교인일 지라도 나의 죽음후 천당에 가는것도 바라지 않고 마귀가 되는것도 싫고 또한 환생도 바라지 않는다. 이세상에 태여날때 아무것도 모르고 이 험악한 이세상이 편치않음을 알고 울면서 우연하게 육체와 영혼을 갖고 태여낫듯이, 죽을때도 아무것도 모르듯 우연하게 내육체와 영혼이 영원히 함께 깨끗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싶다. 이러한 사유가 종교심의 원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종교에 대한 본인의 신앙지식의 공간이다. -끝- 

 

 

글쓴이;西湖堂/이도희(아오스딩/edohyy)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