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가톨릭 굿뉴스에서 퍼온 글) 두 달 동안 자다가 깨보니

From a distance 2015. 12. 19. 15:33

작성자    김형기(hyonggikim)  쪽지 조회수 1669 번  호   1906
작성일   2015-07-01 오전 10:11:48 추천수 8 반대수 0

 

 

두 달 동안 자다가 깨보니

 

오늘이 교통사고를 당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해마다 오늘이 오면 내 제삿날을 맞은 것처럼 숙연한 마음으로 사고 날 때부터 다시 걷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본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새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신 분들 그리고 입원 중에 찾아 주신 분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사고를 당하고 두 달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모든 게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니 고통은 심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되었다. 왼쪽 다리는 절단되었고, 오른쪽 다리뼈는 여러 도막으로 부러져 있었고, 성대가 손상되어 목소리를 잃었고, 배에는 음식을 주입하기 위한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고,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생명 유지 장치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 숨이 넘어갔다가 심폐소생술을 거쳐 다시 살아난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기가 막힐 뿐이었지만, 사고 전에 열 번 정도 읽은 욥기의 다음 구절이 떠오른 건 그야말로 은총이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 2,10)

 

생각날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그래, 받아들이자. 그리고 절대로 주님을 원망하지 말자.”라고.

 

저녁에 병실에 혼자 남겨질 때마다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언제부터인가 두려움이 없어지더니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행복해졌다.

 

“주 하느님, 아침 하늘이 새날을 알리고, 저희를 둘러싼 모든 피조물이 찬미의 노래를 시작하나이다.” 라는 아침 기도문 그대로 매일 맞이하는 아침은 주님의 선물이었다. 하루를 더 살 수 있거니 생각하면 가슴이 벅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날마다 하루씩만 더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 성대 수술을 받고 목소리를 되찾아서 퇴원하고, 얼마 후부터는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오른쪽 다리에 얼기설기 엮어 둔 여러 개의 쇠막대기도 제거하고, 외래환자로 재활원에 드나들며 걷는 연습을 시작하니 비록 휠체어의 신세를 져야 하는 장애인의 몸이었지만 행복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선물로 받으며 살아온 지 10년이 지났다. 살고 죽는 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님을 깨닫고, 죽음이 친구처럼 늘 곁에 있음을 느끼게 되니 마음이 늘 바빴다.

 “언젠가 떠나겠지. 그게 오늘일 수도 있어.”

그래서 하고 싶은 건 바로 해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서둘러 한 일이 꽤 된다.

 

거창하게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라고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미루었던 일도 겁 없이 저질렀다.

     늘 쪼들려서 오래 미루었던 모국 방문을 통해 가족 친지를 방문했고, 친구들을 만나 보았고, 캐나다 로키 마운틴도 다녀 왔고, 유럽에도 다녀 왔고, 며칠 동안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해돋이와 해넘이를 여러 번 지켜보았고, 얼마 전에는 크루즈 여행도 다녀 왔다. 돈 없고 시간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던 일도, (여전히 돈은 없지만) 시간이라도 많아서 이렇게 저지를 수 있었으니 감사하다. 물론 이런 일은 딸들과 한국의 가족, 그리고 여러 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버킷리스트를 만든다면 꼭 넣었을 일도 제법 많이 이루어졌다.

     작은딸 결혼식에서 딸의 손 잡고 입장하기. 외손녀와 외손자가 태어나 자라는 걸 보기.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표지에 내 이름이 찍힌 책 출판하기. 마음껏 음악과 영화를 감상하고 책 보기. 한껏 게으름 피우기. 혼자서 라면 끓여 먹기 등. 불가능해 보였던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버킷리스트에는 올리더라도 신체장애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마음속에만 간직하려 한다.

 

앞으로 올 10년은 어떻게 지내야 할까? 하루만 더 살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만둔 지 오래이니 그동안 욕심이 커졌나 보다. 주님의 뜻이 무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라고 한 성모님의 말씀대로 모든 게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 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저를 지켜보며,

    “당신이 넘어지면, 내가 잡아줄게요.

    어둡다고 하면, 내가 불 켜줄게요.

    춥다면, 내 옷 벗어 줄게요.

    아프다면. 내가 아픔 덜어 줄게요.” (팝송 ‘The Way I Am’ 가사에서)

이런 마음으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도움 주시고, 지켜봐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며, 이분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살아나서 10년이나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좀 느긋하게 지내다가 주님이 10년의 삶을 더 허락하신다면 2025년 6월 27일에 이런 글을 또 쓰려고 합니다. 내 나이가 80에 조금 더 가까워질 그날까지 고마운 분들, 특히 나이 드신 모든 분이 기다려 주실 수 있기를 주님께 청해 봅니다.

 


(2015년 6월 27일)


2015.12.19  평화 : 읽고 또 읽어도 좋은 글이다. 감동의 글이다. 그렇기에 잘 모셔두고 또 읽고 싶다. ^^